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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게스트 김아린 대표의 크고 크고 작은 할 말들

백미당, 일치, 설화수 플래그십, SSG푸드마켓….식공간부터 패션, 뷰티, 아트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수많은 핫 플레이스를 탄생시킨 주인공. 올해로 15년째 브랜드 컨설팅 회사 비마이게스트를 이끌고 있는 김아린 대표의 새로운 한남동 사옥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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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입구 안쪽으로 김아린 대표의 집무실이 있다. 벽면에 걸린 고운 누비 원단은 어머니 양주혜 작가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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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마 코펜하겐Frama Copenhagen의 날카로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사이드 테이블과 따스한 감성이 깃든 소품 모두 김아린 대표의 취향을 잘 드러낸다.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자신의 소설 <작 은 것들의 신>에서 이렇게 적었다. “‘공기’는 ‘생각’과 ‘할 말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런 때에는 오직 ‘작은 것들’만 말해지는 법이다. ‘큰 것들’은 말해지지 않은 채 안으로 몸 을 숨긴다.” 김아린 대표의 비마이게스트 사옥 앞, 정원에 심은 라일락나무 그림자가 짧아지는 한낮의 풍경을 보며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다. 작업실 ‘공기’를 가득 채운 그의 ‘생각’과 ‘할말들’이 제각기 입을 열었기 때문일까. “제가 갖고 싶은 것을 모아보니 하나같이 1940~1960년 대 미드센추리 모던 디자인으로 귀결되더군요. 저도 모르 게 편안함을 느끼는 저의 심미적 토대라고 할까요.” 르코 르뷔지에Le Corbusier가 건축물에 사용한 색을 담은 책 < 폴리크로미 아키텍처럴Polychromie Architecturale>에 서 영감을 받은 벽 컬러, 피에르 잔느레Pierre Jeanneret 의 빈티지 체어, 장 프루베Jean Prouve의 캐비닛까지.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 속에서 꽃피던 당대 디자이너들의 가구는 그 시간만큼의 역사를 품은 주택 속에 어우러져 묘 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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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주 작가가 손으로 깎아 만든 스툴과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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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벽면의 절반은 푸른색으로 도장해 상쾌한 기분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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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미팅룸 정면으로 아치형 입구가 나란히 보인다. 왼쪽 입구에서 2층 사무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주방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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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앞 미팅룸에는 김아린 대표가 개인적으로 수집하는 오브제가 곳곳에 놓여 있다. TV 스크린을 통해 구본창 작가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장소에 깃든 시간의 지층

1957년에 지은 오래된 가정집 주택이었다. “사무실을 옮 기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한남동 골목길을 거닐다 ‘이곳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삼거리 골목에 동네 터 줏대감처럼 들어앉은 건물 1층에는 이름도 정겨운 ‘고향 마트’가 있었다. “동네 사람이 모두 랜드마크처럼 여기는 곳이더라고요. 퀵 기사님이 ‘고향마트에서 우회전이요’라 고 얘기하면 다 알아들었죠.” 단숨에 마음을 뺏겨 계약한 이 주택은 12년 동안 두터운 신뢰 관계를 쌓아온 이건축 연구소 이성란 소장이 레노베이션을 맡았다. 워낙 서로 잘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기에 김 대표는 자신의 취향을 일일 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짐을 얼마나 수납할 수 있는지 등 현실적인 문제를 의논했어요. 사무실 구조나 마감재, 컬러에 대해서는 소장님을 믿고 거의 전적으로 맡겼죠.” 60년 이상 된 낡은 집을 개조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떤 부분을 어디까지 살릴지 또는 없앨지 그 균형점을 찾 는 일이었다. “상공간이 아닌 작업하는 생활 공간이다 보니 ‘적당히’ 손때 묻은 느낌을 만들어야 했어요.” 이 소장은 1950년대부터 시대를 거치며 변경된 집의 요소를 조 금씩 살려 여러 시간대를 한데 중첩시키고자 했다. 1950 년대 쌓은 회색 벽돌과 지붕, 1970~1980년대 설치한 2층 테라스 난간, 천장과 마감재는 그대로 살렸다. 대신 벽돌 담장을 허물고 계단을 설치해 개방성을 더했다. 오랜 세월 동안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지층을 발굴하듯 이 건물에는 켜켜이 쌓인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의 사옥도 사옥이지만, 김 대표는 타인의 장소에 깃든 역사를 기꺼이 존중하는 예우도 잊지 않았다. 고향마트가 건너편 건물로 이전하기 전, 김희원·이승재 작가와 함께 마트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마트 사장님께 앨범을 선물한 것이다. “역사,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이 동네에 관 한 추억 말이에요.” 김희원 작가가 마트 차양을 촬영한 사 진으로 만든 기념 파라솔은 테라스를 늠름히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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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지은 오래된 가정집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천장과 마감재가 미드센추리 가구와 절묘하 게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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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주방에서 2층 사무실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 역시 원래 있던 것을 그대로 살린 것 이다.
작은 정원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라일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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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게스트 사옥 전경. 지 하에는 김아린 대표가 운영하는 프린트 아트 숍 아티초크가 있고, 1층의 절반은 앤디앤뎁 매장이다.

그해 여름이 남긴 것

“정말 펄펄 끓듯이 더웠어요.”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 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때는 작년 7월 30일, 손 없는 날 로 정한 이삿날이 마침 40℃가 넘는 무자비한 폭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실외기를 달기 전이라 에어컨이 없었고, 지 게차가 현장에 올라올 수 없어서 짐을 하나씩 들고 옮겨야 했다. 이 처절한 광경에 동네 이웃 주민도 응원과 지지를 보냈다. “앞집 ‘창화당’에서는 전을 부쳐 바구니에 담아 갖 다주시고, 고향마트에서는 집 냉장고를 맡겨놓은 양 내내 얼음과 음료수를 사다 마셨죠.” 천재지변급 폭염 속에서도 소신껏 책임을 다한 현장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는 김아린 대표. 감동을 느낀다는 건 주는 대상과 마음의 실 이 이어져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는 스스로 회사를 “조그만 구멍가게”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규모만 작을 뿐 매우 명민한 회사다. 레스토랑에 놓 이는 사소한 기물 하나하나까지 다 신경 써야 하는 철두철 미한 성격 탓에 1년에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 수를 정해 놓으니 직원도 많이 필요하지 않다. “‘애자일agile’이라는 마케팅 용어처럼 프로젝트에 따라 조직을 긴밀하고 민첩 하게 투입해 효율성을 높이는 거예요. 무엇보다 제가 주도 적으로 빠르게 행동해야 하죠.”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매 순간 늘 쉬지 않고 살아 있으려고 노력해요. 삶 자체로 치 열함을 보여주는 부모님(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불문학자 이고 어머니는 설치 미술가다) 덕분인지도 모르죠. 두 분 은 ‘놓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처럼 절대 예술에 대해 놓지 않거든요.” 사람을 향한 따스한 시선과 달리 일 에 대해서는 한없이 날카롭다. 그의 공간 속에 ‘말해지지 않은 채’ 숨은 ‘큰 것들’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일과 삶의 블렌딩, 디자이너의 오피스 BE MY GUEST
건축가의 코멘트: 건축소사무소 이건축연구소 소장 이성란

이건축연구소 대표 이성란

“집의 사용 승인 날짜를 확인해보니 1957년 11월 12일이었다. 1950년대 주택의 일부를 남기며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세월의 기억을 유지하려 했다. 동시에 오피스로서 필요한 기능이 가능한 공간으로 바꾸어가는 작업이었다.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삼거리로 갈라지는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으로 동네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자리에 위치한 것이다.

골목길과 집의 경계를 이루는 담장 대신 폭이 3m가 넘는 계단을 만들었다. 앤디앤뎁과 비마이게스트로 진입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일종의 세미 퍼블릭 스페이스다. 장소의 기억을 살리는 것은 두 번째 중요한 축이었다.
1950년대에 건축한 후 1970~1980년대를 거치며 조금씩 변경되었을 것이다. 각 시대별 단독주택의 형태를 보여주는 회색 벽돌 외벽과 지붕, 2층의 테라스 난간 등의 요소를 그대로 살려 여러 시대의 시간성을 중첩시키고자 했다.”

지난해 늦은 여름, 비마게스트는 새로운 사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멕시코 대사관 길에 있던 사옥에서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뒤편의 가정집을 개조한 곳으로, 한남동에서 또 다른 한남동으로 옮긴 셈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고향마트’라는 정겨운 느낌의 장소를 발견하고 단번에 마음에 들었는데 우연이 인연이 되어 물 흐르듯 상황이 진전됐다. 기존 사옥 레노베이션에서 믿음직스러운 파트너가 되어주었던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이 이번에도 레노베이션을 맡았다. 이성란 소장은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동네의 터줏대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세 갈래 길로 나누어지는 지점 한쪽에 위치한 모습이 마치 동네를 지키고 있는 형상처럼 느껴졌다. 주택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을 허물고 3m 너비의 계단을 설치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부담 없는 구조다. 계단 자리를 다른 공간으로 이용한다면 그만한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김아린 대표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문과 붉은 벽돌 담장을 없애고 그라운드 층으로 이어지는 3m가량의 계단을 설치한 덕분에 동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질 정도다. 가로로 긴 회색 벽돌 외벽과 지붕, 2층의 테라스 난간 등은 옛날 형태를 그대로 유지했기에 오피스와 패션 숍으로 바뀌었지만 가정집의 따스한 느낌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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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게스트를 이끌어가는 김아린 대표. 벽면에 걸린 어머니 양주혜 작가의 그림은 외할머니가 사용하던 누비 원단에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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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응접실은 비마이게스트와 아티초크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예술품과 공예품이 곳곳에 정갈하게 놓여 있다. 의자, 테이블 위, 벽면을 장식한 패브릭은 스튜디오 소메Studio SOMEE의 ‘Saliba’로 피크닉 담요로 사용해도 좋고, 가구 위에 걸쳐놓아도 멋스럽다. 카시나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스툴은 샤를로트 페리앙이 디자인한 ‘Tabouret Ber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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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납장 위의 작품은 극사실주의 조각가 론 뮤익Ron Mueck의 ‘Boy’ 사진 에디션.

공간 구성을 보면 지하층(1층으로 보이지만 건축법상 지하층에 해당한다)에는 비마이게스트가 운영하는 프린트 아트숍, 아티초크가 있다. 방문객을 환대하는 듯한 계단을 오르면 오랜 시간 한자리를 지켜온 게 분명한 라일락나무를 중심으로 작은 정원이 자리하고 1층의 절반은 앤디앤뎁 매장, 나머지 1층 공간과 2층은 비마이게스트 사옥이다. 사옥 1층에는 미팅 룸과 자료실, 키친이 자리하며 2층은 김아린 대표의 개인 사무실과 직원들의 사무 공간, 휴식 공간 등이 위치한 오피스 공간이다. 여러 개의 방과 거실로 이루어졌던 2층 구조를 사무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이 핵심이었다. 방문을 없앤 각 이동 공간은 기존보다 넓히면서 아치형의 회랑 형태로 만들어 아늑함을 더했고, 독특한 나무 문양의 벽과 천장으로 된 방은 마감재를 그대로 두어 휴식 공간으로 바꾸었다. 수납공간도 직업 특성상 중요하게 여긴 부분. 예전 사옥에는 체계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시스템 월을 제작했지만 이번에는 공간이 여의치 않아 1층 한쪽에 작은 룸을 만들어 프로젝트별 샘플을 보관하고, 그릇을 효율적으로 수납할 수 있는 장식장을 길게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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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의 벽면 컬러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친 피에르 잔레의 그림 ‘Still life of Esprit Nouveau pavilion’. 작품과 어울리는 색을 르코르뷔지에의 책에서 찾아 주방과 아티초크 외벽의 컬러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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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모던 디자인과 건축을 사랑하는 김아린 대표는 휴식 공간 한쪽 벽면에 르코르뷔지에의 그림 태피스트리를 걸어두었다. 미팅 공간에는 인도의 토속적인 재료와 장인의 공예 기술이 합쳐져 독특한 지역 정서를 풍기는 피에르 잔레의 체어와 라운드 테이블을 함께 두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민 공간 곳곳은 호사스럽지 않으면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예술의 온기를 품고 있다. 김아린 대표가 오랫동안 수집해온 예술 작품과 공예품, 가구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놓여 있었다는 듯 공간과 어우러진다. 김아린 대표는 이번 레노베이션에서 컬러를 찾을 때 영감받은 것이라며 아끼던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르코르뷔지에의 <폴리크로미 아키텍처럴Polychromie Architecturale>로, 부제는 ‘Color Keybords from 1931 and 1959’였다. 르코르뷔지에가 1931년부터 1959년까지 지은 건축물에 사용한 컬러를 건반 모양의 컬러 팔레트로 구성한 책이다.

“주방에 피에르 잔레의 그림을 두었는데, 그림과 어울리는 색을 이 책에서 찾아 주방의 한쪽 벽과 아티초크 외벽을 구성했다. 르코르뷔지에는 건축도 훌륭하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그림이다. 휴식 공간 한쪽 벽에도 르코르뷔지에 그림의 태피스트리를 걸어두었는데, 왜 그의 그림이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색감 때문이었다. <폴리크로미 아키텍처럴>을 보면 그가 건축물에서도 얼마나 꼼꼼하게 컬러를 선택하고 조합했는지 알 수 있다.” 2004년에 시작한 비마이게스트는 올해로 15년이 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5명 내외의 소수 인원을 유지하며 1년에 4~5개의 프로젝트로 제한하고 있다. 설화수 플래그십, 백미당, SM엔터테인먼트의 SUM 등 최근 몇 년 새에 비마이게스트가 참여한 프로젝트를 보면 이 작은 회사의 저력이 궁금할 것이다. 비마이게스트는 브랜드 컨설팅 회사로, 프로젝트의 가장 처음 단계에서 방향성을 제시하거나 철학을 재정립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파리바게트, 마몽드, 정관장 등과 함께 작업했다. 지금은 눈에 달게 보이는 것이 너무 많은 시대이다 보니 오히려 헤리티지를 간직한 브랜드가 도드라진다. 이미 탄탄한 제품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고 역사만큼 철학도 깊다. 우리가 하는 건 감춰진 걸 꺼내어 다시 한번 읽어내고 사람들에게 ‘역시 멋있네!’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일이다. 회사 웹사이트 첫 페이지에 쓴 ‘We make brands shine’처럼 브랜드를 반짝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아치 형태의 회랑에 기댄 김아린 대표를 카메라에 담고 보니 벽면에 걸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어머니 양주혜 작가의 작품으로, 할머니가 만든 누비 원단 위에 어머니가 그린 그림이니 매일 3대가 한 공간에 있는 셈이다. 언젠가 김아린 대표는 부모에게 받은 유산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무한한 긍정과 따스한 시선으로 들여다보고, 살아 있음에 기뻐하는 것’이라 말했다. 새로운 사옥에서 김아린 대표와 비마이게스트가 만들어갈 세계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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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없앤 각 이동 공간은 기존보다 넓히면서 아치형의 회랑 형태로 만들어 아늑함을 더했다. 김아린 대표의 사무실과 오픈 형태의 문과 연결된 팀원들의 사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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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되기 이전의 사진을 보면, 야채와 쌀 등의 식료품을 판매하던 고향마트와 주차장이 있던 곳이 현재 아티초크 매장으로 변모했다. 기존의 고향마트는 비마이게스트 건너편 건물로 이전했다. 사무실 이전 후 김희원, 이승재 작가와 함께 고향마트의 추억을 담은 사진전을 열고 기념 파라솔을 만든 이벤트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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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층을 오르내리는 나무 계단, 1층에서 아티초크로 통하는 계단 등 비밀 통로 같은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는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 아티초크와 비마이게스트는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곳이지만 서로 이동할 수는 있어야 하기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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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가구숍 덴스크에서 구입한 모빌과 양주혜 작가의 작품. 양주혜 작가는 수건이나 방석, 이불, 침대보 등 일상의 사물에 색점을 만들고 지워나가며 시간을 기록한다.

비마이게스트 사옥
레노베이션 건축사사무소 이건축연구소 yiarch.com
설계 건축사사무소 이건축연구소(이성란, 최재용, 위소혜)
시공 제효건설(이진서), jehyo.com
위치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683-52중심으로

프롬나드 그리고 한남작업실:: 경계를 허문 전문가들의 일상 공간

집 담장을 허물었더니 새로운 골목길이 생겼다. 또 직업의 경계를 허물었더니 더욱 다채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고 영감도 교류하게 되었다. 현대 미술가의 작품으로 구성한 갤러리도 있고, 옻칠 작가의 식기로 채운 카페도 있다. 건축가 이성란 소장이 만든 용산구 이태원로의 작은 군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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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옻칠 작가 허명욱 작가, 알롤로 갤러리 관장이자 플로리스트 이경아, 도시 재생과 가치 있는 공간 창출을 고민하는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 분야가 서로 다른 이들이 한데 뭉쳤고, 용산구 이태원로에서 새로운 골목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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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를 철거하고 뚫은 둥근 천장이 인상적인 이건축연구소. 내년에는 이곳에서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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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물론 도구에도 시간의 흐름을 담고자 작업 일자를 기록하는 허명욱 작가의 작업을 엿볼 수 있는 한남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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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작업실에서는 허명욱 작가가 만든 식기에 담긴 차와 커피, 케이크, 통영에서 공수하는 꿀빵과 제철 재료로 만든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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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삼동의 사무실 밀집 지구를 떠나 이태원로의 주택을 리모델링하고 오피스 하우스로 꾸민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

작가의 작업실을 옮겨놓은 듯한 한남작업실. 갤러리에서만 볼 수 있던 허명욱 작가의 옻칠 컵, 트레이, 접시에 담긴 커피와 차, 디저트를 맛볼 수 있다.

도시 번화가는 늘 크고 작은 공사의 소음으로 시끄럽다. 신사동 가로수길, 마포구 연남동, 용산구 경리단길과 해방촌 등 ‘핫 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우후죽순 새로 들어서는 건물들로 끊임없이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시의 생태계. 재생을 넘어 재창조로 이어지는 미래 건축의 패러다임에 오래전부터 주목해온 건축가가 있다. 2012년, 철거 지역의 버려진 붉은 벽돌과 문짝, 창문 등을 활용해 재개발 지역의 삶과 기억을 재생하고자 한 작업의 일환으로 용산구 한남동의 제일모직 비이커 건물을 새롭게 탄생시킨 건축가. 2016년 <행복>에 오래된 주택을 허무는 대신 재생, 일상 예술, 정원을 키워드로 리모델링한 자신의 집을 소개하기도 한 이건 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이다. 그러한 그가 역삼동 빌딩 숲을 떠나 이태원로의 주택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쭉 강남에서 일했어요. 회사는 중심 업무 지구인 역삼동 테헤란로에 있었고요.” 이성란 소장이 작년 겨울, 1989년에 지은 주택을 리모델링해 이사한 이유는 이렇다. 8차선 도로가 아닌 주거와 상권이 공존하는 골목, 빌딩의 전형적 사무 공간이 아닌 오피스 하우스를 원했기 때문. 모과나무, 살구나무, 단감나무, 배롱나무가 있는 정원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이성란 소장이 한창 공사 중일 때 눈여겨봐둔 옆집, 1988년에 지은 주택에 플로리스트이자 알롤로 갤러리를 운영하는 동생 이경아 관장이 이사 왔다. 그리고 자매는 나란히 붙은 주택에 산책이라는 뜻의 ‘프롬나드promenade Ⅰ, Ⅱ’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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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나드Ⅰ과 Ⅱ사이의 담벼락이 있던 자리. 허명욱 작가, 이성란 소장, 이경아 관장 그리고 이곳에 입점한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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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나드Ⅰ에 입점한 실크 웨어 전문점 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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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나드Ⅱ2층에 위치한 알롤로 갤러리. 이곳에서는 이경아 관장의 플라워 클래스도 열린다./fig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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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마 야요이, 무라카마 다카시, 로버트 인디애나 등 현대미술 화가의 작품과 포스터를 전시하며 프라이빗 플라워 클래스도 열린다.

공간 기획자가 된 옻칠 작가

올해 5월, 두 건물의 다채로운 공간 중 가장 늦게 완성한 카페는 옻칠 작가 허명욱이 기획한 공간이다. “작년 허명욱 작가의 용인 작업실 설계를 의뢰받았어요. 보통 미팅 자리에선 머그에 커피나 티를 내기 마련이잖아요. 한데 허 작가는 본인이 만든 식기에 직접 내린 커피와 소담스럽게 담은 딸기를 내오더라고요.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카페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 우스갯소리를 하다 실제 이성란 소장 본인의 건물 빈 공간에 작업실 겸 미팅 장소 겸 카페를 열어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름은 ‘한남작업실’이라 붙였다. 허명욱 작가가 직접 도안을 보고 공간을 기획했다. 허명욱 작가의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개방하자는 취지도 더했다. 오래되어 공간의 스토리가 느껴지는 테라코타 바닥을 그대로 살리고,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은 폴딩 도어로 교체해 테라스와 정원으로 공간이 이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아라리오 갤러리와 조은숙 갤러리에서 보던 허명욱 작가의 옻칠 컵, 트레이, 접시에 커피와 티, 디저트 등을 담아낸다. “제 작업실을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이 공간에서 저의 작업과 감성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허명욱작가의 말대로 이곳에는 작가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과거에 쓰이고 현재에 쓰는 도구가 혼재되어 있다. 시간의 의미를 찾는 허명욱 작가 작업의 연장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작업의 스펙트럼이 넓은 허명욱 작가의 페인팅, 조각, 공예, 사진 등 다양한 작품과 도구로 매번 다르게 구성할 예정. 특히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집이 창조가 될 때>전과 현재 구하우스 미술관에서 12월 16일까지 열리는 <허명욱의 옻방>전에서 직접 모은 빈티지 가구만을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빈티지 컬렉터인 허명욱 작가가 수집한 가구, 조명, 소품, 작업 도구 등으로 채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두 건물 사이의 담장을 허물고 길을 텄다. 건물과 건물 사이는 바람이 드나들고 초록이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상생은 또 다른 창조의 원천

“둘 다 빨간 벽돌 건물이었어요. 색이 예쁘고 질감이 살아 있는 벽돌 벽은 그대로 살렸지요. 일부 벽돌이 없는 곳은 메웠고요. 외벽에 붙어 건물을 가리던 구조물을 뜯어내고 발코니를 만들었어요. 주거 공간이던 지금의 사무실은 구조변경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없애고, 물탱크가 있던 자리를 비워 동그란 천장을 뚫은 정도의 시공만 했어요. 도로에 면한 지하층, 정원과 테라스가 있는 1층을 분리했고요.” 이경아 대표의 프롬나드Ⅱ는 한 층에 두 가구가 거주해 좁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구조였다. 널찍한 갤러리 겸 상업 공간으로 쓸 예정이라 일부 내력벽을 남기고 H빔으로 보강한 다음 나머지 벽은 다 헐었다. 어두운 반지하층에는 도로 쪽에 선큰을 만들고, 창문으로부터 자연광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의 담장 또한 허물고 길을 텄다. 어느새 가드너가 된 이성란 소장은 레몬밤, 버베나, 수국, 블루 세이지, 레몬그라스, 설류화, 라일락 등이 있는 작은 정원을 조성해 건물과 건물 사이 눈이 쉬어 가는 공간을 만들었다. “빌딩 숲에서 지내다가 나무가 가득한 이곳으로 출퇴근하고 있어요. 땅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덱의 일부는 철거한 다음 식물을 심었어요. 특히 프롬나드Ⅰ과 프롬나드Ⅱ사이의 덱이 그래요. 직사각형의 미니 정원을 만들었는데, 두 건물사이에 있어 해가 들기 힘든 음지인 점을 고려해 고사 리, 이끼, 눈개승마 등 음지식물을 심었어요.” 역삼동에 비해 절반 정도 좁아진 사무실이지만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다. 창문을 열면 초록 정원이 내다보이고 싱그러운 향이 올라온다. 이성란 소장의 이건축연구소와 이경아 대표의 알롤로 갤러리 외 공간에는 실크 웨어 전문 숍 ‘부희’, 가죽 잡화 브랜드 ‘레이틀리 스튜디오’, 리빙 편집매장 ‘두블르쥬’, 주얼리 숍 ‘젬앤페블스’ 같은 개성 있는 가게들이 입점했다. “역삼동에서는 굳이 이웃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곳에선 좁은 골목을 오가며 익히게 된 얼굴과 인사를 나누고 교류하게 돼요.” 두 주택 사이의 담을 허물고 건축, 예술, 카페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상생하는 프롬나드의 일상. 경계를 허물고 새로 생긴 길로 드나드는 건 비단 사람 뿐이 아닐 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 간의 수다가 끊이지 않고 크게는 문화, 철학으로 서로 두터워질 프롬나드의 없어진 경계가 기대된다.

주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55나길 7 문의 한남작업실(02-792-5620), 알롤로 갤러리(02-552-3326)

글 이경현 기자 | 사진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8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건축가 이성란 :: 일상과 건축의 맥락 잇기

소담하게 핀 수국과 핑크빛 결실을 맺은 배롱나무, 단정하게 정리된 농기구들, 일관된 취향으로 채워진 예술 작품….
만약 공간이 누군가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여러 단서를 제공한다면, 건축가 이성란의 서초동 자택은 증거 찾기가 더할 나위 없이 수월하다. 건축가라는 업을 떼어놓고도 순도 높은 취향만으로 얘기가 되는 공간. 먼저 그의 라이프스타일을 들여다보기 전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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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베이션, 가구 디자인, 디스플레이 등 건축이라는 큰 맥락 아래 다양한 창조적 작업을 펼치는 이건축연구소 이성란 소장.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해 마당을 가꾸고 컬렉션한 작품을 일상 공간에서 향유하며 취향 있는 삶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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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원형 아트월. 식물과 예술 작품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으로, 기분 좋은 환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일모직 정크야드 프로젝트 파사드 디자인(2012), 디자인 퓨처롤로지 서울대 미술관 전시(2012), 럭키슈에뜨 청담동 플래그십 인테리어(2012), 대전 성심당 케익부띠끄 파사드 디자인&인테리어(2013), 루쏘 랩 카페(2014), 라페트 플라워 부띠끄&카페 레노베이션 (2015), 서울패션위크 키오스크 디자인(2015, 2016), 휠라 플래그십 설계(2016), 아스토리아 호텔 레노베이션 인테리어(2016),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 <김데몬>전(2016)…. 이성란 소장은 건축가지만 오히려 전시 기획자나 아티스트 혹은 리모델링 전문 디자이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게 ‘건축’을 얘기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건축은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에요. 작은 집을 짓더라도 그 지역이 지닌 사회성, 건축주의 삶, 취향, 주어진 예산까지… 건축가 혼자의 생각으로 지을 수 없죠. 특히 요즘은 인문학적 건축부터 도심 재생, 셰어링까지… 좀 더 다채로운 시각으로 건축을 바라봐야 할 때죠.” 넓은 의미에서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적 ‘콘셉트’보다 사회적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히 많은 키워드를 ‘건축’ 너머의 ‘시간의 가치’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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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 한쪽의 다이닝 공간. 루이즈 부르주아가 1947년에 출판한 일러스트 북을 2005년 MoMA에서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였고, 이를 액자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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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엌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내 동선이 편리하다.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는 동생 이경아 씨가 직접 찍은 숲 사진과 실제 마당이 대치되는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2 수많은 아트워크 중에서도 정수만 모아 놓은 지하 서재 공간. 소반에 투명 유리 병을 조르르 올려둔 감각이 돋보인다.
3 면, 선, 점의 추상화와 몰딩 형태 오브제, 가구까지…. 수년간 모은 컬렉션의 건축, 인테리어적 요소가 돋보인다.

 

첫 번째 키워드, 재생

우리 사회는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데 너무 익숙하다. 최단 시간에 최대한 짓고 더 비싼 가격에 팔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흐름이 바뀌고 있다. 기존 건축물을 허물지 않고 새 수명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이라는 화두는 건물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가 될 수 있고, 건축으로 인해 삶이 풍요로워지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재생 건축 하면 빼놓을수 없는 프로젝트가 바로 한남동의 플래그십 스토어 ‘비이커’의 파사드다. 용산역 근처 철거하는 교회에서 떼어낸 나무 창문, 여전히 단단한 붉은 벽돌, 가스 파이프와 물탱크, 수도꼭지까지 서울 곳곳의 건축 폐기물과 폐가구 등을 콜라주한 파사드는 패션 브랜드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하는 동시에 낭비적 재개발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다. “업사이클링을 콘셉트로 하는 비이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철거 지역에서 버려지는 건축물의 부분을 모아 콜라주로 재탄생하는 작업을 시도했어요. 시간, 역사, 정신 등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도시 기억의 재생과 방법에 관심이 커졌지요. 그다음 프로젝트로 성심당 리모델링을 맡으면서 ‘새로 짓는 것만이 건축가의 역할은 아니다’는 확신이 들었고요. 그런 생각들이 점점이 모여 사는 집도 이렇게 신축이 아닌 리모델링을 선택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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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란 소장의 취향이 집약된 지하 서재. 작품은 왼쪽부터 케이트 셰퍼드Kate Shepherd의 ‘Big Ink Tilted Floor’(2008). 상상이나 실제의 이미지를 스케치업 프로그램으로 도면화한 후 나무판 위에 정교한 라인을 표현했다. 가운데 작품은 존 발데사리John Baldessari의 ‘God Nose’(2007). 오른쪽은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 중 빌바오 구겐하임 뮤지엄.

 

1991년도에 완공한 주택 단지의 3층 집. 대문을 열면 작은 통로를 지나 너른 마당이 펼쳐지고, 그 시대에 통상적으로 지은 ㄱ자형 벽돌집이 마당을 품고 있다. 이 집이 들어섰을 무렵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해체주의에 탐닉하며, 모던 컨템퍼러리의 영향으로 메탈, 비정형 등 실험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만약 그때라면 이 집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 말하는 이성란 소장. 건축가라면 응당 자신이 직접 지은 집에 살고, 또 그런 집을 매체에 번듯하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도 클 것이다. “저 역시 날 선 디테일에 집착하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그런 시기가 지났어요. 또 건축은 ○○해야 한다, ○○○스타일의 강박도 없어졌고요. 학부때 선생님이 모던과 클래식을 병행하는 분이셨어요. 학생들이 당신의 스타일은 무엇이냐고 질문했죠. 그때 하신 말씀이 ‘건축가에게 왜 스타일이 있어야 하나?’ 였는데, 그 의미를 차츰 알겠더라고요. 클라이언트가 모두 다른데, 똑같은 제품 만들 듯 똑같은 스타일, 똑같은 프로그램, 똑같은 설계를 할 수 있나요? 건축물 자체가 품고 있는 세월의 흔적, 기억 등이 오히려 변별력이 되는 세상이죠. 옛 것의 불편함이 오히려 럭셔리로 다가오고요. 리모델링이 손이 더 많이 간다곤 하지만 제한이 있으니 순발력도 발휘하고,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오래된 건축물에는 ‘시간’이라는 또 하나의 재료가 입혀져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20년 된 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은 객관식 문항의 답을 찾듯 순조로운 과정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40년쯤 된 집은 설비와 배관 모두 교체해야 하지만, 다 뜯어버리기에는 아직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들이 있어 예산에 맞춰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바닥 난방을 바꾸려면 말짱한 대리석 바닥재를 모두 교체해야 하니 그냥 두고, 외벽의 벽돌 마감을 그대로 두는 대신 창호를 모두 바꾸는 등 큰 결정을 한 후 세부적으로 둬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정했다. 거실과 주방에서 모두 마당이 보이도록 구조 변경을 하고, 1층과 2층의 거실, 지하 서재의 천장은 노출해 층고를 높였다. “보통 전원주택을 설계할 때는 탁 트인 공간이 좋다고 생각해서 무조건 창문을 크게, 많이 내요. 그렇게 하면 외피가 많아져 열 손실도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이 집은 원래 북쪽에 창이 없거나 작은 구조라 열 손실 걱정 없이 마당이 보이는 남쪽으로 과감하게 기다란 통창을 낼 수 있었죠. 주어진 상황에 맞춘 거지만 실질적으로도 동선이나 시선은 필요한 부분만 확실하게 열어주는 것이 효과적이에요. ‘선택’과 ‘집중’의 맥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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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양한 허브와 채소를 심은 텃밭과 배롱나무, 겨울이면 실내로 들어오는 화분 식물까지….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정원’이다. 정원에서 계절을 만나고,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며, 농사는 정직하지만 또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자연의 섭리를 매일매일 깨닫는다.
2 지하 서재와 1, 2층 거실 천장은 노출로 드러냈다. 사선 보가 공간의 구조적 느낌을 배가한다.
3 주방에서 마당으로 연결되는 동선에는 자주 사용하는 농기구와 앞치마, 비옷, 장화 등을 두었다.

 

두 번째 키워드, 일상 예술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이자 구조를 결정하는 나선형 계단은 기존 형태와 마감재를 모두 살리고 페인팅을 다시 했다. 하늘을 향해 빙글빙글 올라가는 나선형 경사로를 따라 구부러진 벽에 예술 작품을 걸어놓은, 마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보는 듯 공간 곳곳에 걸려 있는 작품이 눈에 띈다. 스타 건축가가 되기 전부터 주의 깊게 봐온 프랭크 게리의 스케치부터 박찬우 사진가의 ‘스톤’ 시리즈, 루이즈 부르주아의 ‘해피 하우스’, 김희원 작가의 ‘누군가의 창’ 시리즈, 애니시 커푸어와 이불 작가의 설치 작품, 김광수 작가의 ‘사과 나무’, 그래픽적 라인이 돋보이는 케이트 셰퍼드의 판화, 김원숙 화백의 브론즈 작품까지 워낙 작품의 양이 많아 컬렉션 기준이 궁금했다.

“이성적으로 분석하거나 카테고리에 제한을 두는 편은 아니에요. 이불 작가의 작품은 제가 해체주의를 공부할 때 상상했던 미래 도시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라 마음에 들었어요. 반대로 김광수 작가의 ‘사과나무’는 그림을 둘 자리에 맞춰 골랐어요. 루이즈 부르주아의 손 사진은 제가 닮고 싶은 손이고, ‘해피 하우스’ 는 의미가 좋아서 선택했고요. 그러고 보니 어떤 식으로든 제가 수십년 걸어온 ‘건축’과 연결 고리가 있거나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선호하는 것 같네요.”

특히 2층 거실의 TV를 마치 작품처럼, 컬러풀한 작품과 함께 리듬감을 살려 배치한 아이디어도 재미있다. 마치 쇼케이스처럼 집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나선형 계단의 구심점에는 김원숙 화백의 브론즈 ‘레이디 포레스트’와 초록 식물로 만든 헌팅 트로피, 초록색 스완 체어, 폐목재로 만든 피트헤인이크의 의자를 함께 매치했다. 다양한 식물을 벽에 걸어 버티컬 가든처럼 연출한 공간으로, 그야말로 작품을 일상 예술로 향유하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 이 집에서 무수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자연스레 예술적 산책을 즐길 수 있으리라.

“아파트도, 주택도 창문과 수납공간이 많으면 그림을 걸어놓을 벽이 없어요. 주방의 소음을 차단하고, 거실에서 바라볼 때 그림을 볼 수 있도록 주방과 거실 사이에도 일부러 벽을 만들었어요. 우리가 여행 가면 대표적인 미술관은 꼭 한두곳씩 가잖아요. 기억과 추억이 깃든 나만의 컬렉션, 예술이 특별한 일상이 아니라 이렇게 보통의 일상이라면 생활이 좀 더 촉촉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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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관 입구에서 거실을 바라본 모습. 왼쪽(남향)으로 마당, 다이닝룸 뒤편으로 주방이 자리한다.새시는 새것으로 교체하되, 프레임은 옛날 구조 그대로 사용했고 거실 바닥과 일부의 몰딩도 기존 집에 있던 요소를 그대로 둔 것.소파는 플렉스폼, 1인 암체어는 비앤비이탈리아, 플로어 조명등은 루이스 폴센 제품이다. 북쪽으로는 창문을 최소화해 전망과 채광, 냉난방의 집중도와 효율성을 높였다.
2 지하부터 3층까지 나선형 계단을 축으로 ㄱ자로 펼쳐지는 구조. 마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계단 주위로 작품을 배치해 일상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가 크다.
3 박공지붕의 구조감을 살린 3층 아들 방.
4 헬로우뮤지움에서 8월 28일까지 열리는 <김데몬>전의 설치 작품. 아스토리아 호텔 레노베이션 과정에서 나온 옛날 건축자재와 요소들을 계단 형태로 콜라주한 작업이다. 홍순명, 오정현 작가와 협업.

 

세 번째 키워드, 정원

아침이 오길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품은 것이 언제인가? 마당 가꾸는 재미에 푹 빠진 그는 요즘처럼 일찍 동트는 계절이면 한 손엔 모자, 한 손엔 호미를 챙겨 마당으로 출근한다. 오래전부터 가족 텃밭에 농사를 지었고, 3년 전 이 주택으로 이사하게 된 결정적 계기도 바로 정원 때문이다. 오랜 지인인 켈리타 최성희 대표와 전국 각지의 농원은 물론 영국의 첼시 플라워 쇼까지 챙겨 가볼 정도. 두 사람 모두 워낙 학구적이라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며 정보를 공유하는 최상의 파트너다.
주말이면 근처 허브 농원에 갔다가 서로의 마당에 들러 의견을 나누는 등 무엇보다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있다는 점이 좋다. 봄, 여름, 가을 절기에 맞춰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게 보람되면서도 또 그때여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이 왠지 마음을 숭고하게 만든다고.

처음 정원을 꾸밀 때는 내추럴한 영국 정원처럼 하얀색과 그린으로 색감을 통일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흰색 수국을 찾아 심어도 다음 해에는 핑크로 변하고, 그린색 수국을 찾아 심어도 핑크로 변했다. 흙의 성질에 따라 꽃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흙과 퇴비의 조합에 따라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단다. 화학 공식처럼 누가 도표로 정리해서 알려주면 좋겠는데 농사는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심해서 씨앗을 고르고, 정성껏 월동시켰지만 꽃 색깔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뽑아버릴 수는 없잖아요. 수국 색깔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정원을 가꾸며 순리를 배운다고 할까요. 건축물도, 인테리어도 또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예요. 건축가인 아내의 마음도 모르고 아파트를 고집하던 남편에게 서운하기도 했고, 아이의 뜻이 내 맘 같지 않아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이해할 수 있죠.”

 

네 번째 키워드, 협업

이성란 소장은 건축가지만 다수의 인테리어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지금에야 건축가가 인테리어까지 넘나들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인테리어, 디스플레이는 코디네이터가 하는 일로 터부시되곤 했다. “건축은 오픈 마인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에요. 정해진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다양한 인사이트가 필요한 것은 물론, 하나의 건축물을 구현하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이 필수이기 때문이죠. 가구 소품 디자인은 물론 패션 디스플레이, 결혼식 같은 일회성 이벤트 설치 작업을 진행하면서 오히려 건축가라는 한계에서 벗어났다고 할까요? 구조적 완성도를 챙기느라 실험적 디자인을 펼칠 수 없었다면, 어느 정도 대리 만족도 되는 것 같고요.”

2015년, 2016년 서울패션위크 때 우산으로 키오스크(공공 장소에 설치하는 터치 스크린 방식의 정보 전달 시스템)를 제작했다. 예산의 한계, 기간의 한계, 또 설치 후 재사용 아이디어까지… 일반 설계 작업과 다른 과정으로, 오히려 직원들과 함께 구상하고 고민하고 실행하는 협업을 즐겼다. 8월 28일까지 헬로우뮤지움 동네미술관에서 진행하는 <김데몬: 협동시도> 전시도 재미있게 작업한 것. 그가 관심을 갖는 ‘도시 기억의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침 인테리어 설계중이던 아스토리아 호텔을 철거하면서 나온 흔적을 패치워크해 조형물을 만들었다. 비상 철제 계단을 중심으로 한실 방에서 나온 자개장, 시설실에 있던 장화, 이탈리아 식당의 벽등, 지하실 벽돌 등 흔적들을 모으다 보니 계단이라는 형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미술 작가뿐 아니라 문화 예술 행정가, 의사,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군이 전시에 참여, 서로 협업해 의미가 크다.

“학부 시절 다른 건축가들의 작업을 보면서 토론하는 게 좋았어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소통하면 더욱 창의적인 건축이 나오지 않을까요?” 프랭크 게리의 설계가 페이퍼 아키텍처가 아닌 빌바오의 구겐하임으로 탄생한 것도 결국 구부러진 철판을 구현하는 구조 설계, 시공의 협업자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데몬demon(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창작을 돕는자)’이 되어주며 동등한 존재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지금이야말로 크로스오버와 협업이 필요한 때! 건축가 이성란의 라이프스타일을 취재하면서 하나의 믿음이 생긴 건 분명하다. 그 사람이 곧 그 건축이라는 사실. 건축이 단순히 보기에만 좋은 것을 넘어 사회적 의미까지 담아야 한다는 거창한 철학을 얘기하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가치만으로 삶의 기쁨이나 환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출처.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8월호) ⓒdesig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