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나드 그리고 한남작업실
경계를 허문 전문가들의 일상 공간

집 담장을 허물었더니 새로운 골목길이 생겼다. 또 직업의 경계를 허물었더니 더욱 다채로운 공간이 만들어지고
영감도 교류하게 되었다. 현대 미술가의 작품으로 구성한 갤러리도 있고, 옻칠 작가의 식기로 채운 카페도 있다. 건축가 이성란 소장이 만든 용산구 이태원로의 작은 군락이다.(왼쪽부터) 옻칠 작가 허명욱 작가, 알롤로 갤러리 관장이자 플로리스트 이경아, 도시 재생과 가치 있는 공간 창출을 고민하는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 분야가 서로 다른 이들이 한데 뭉쳤고, 용산구 이태원로에서 새로운 골목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도시 번화가는 늘 크고 작은 공사의 소음으로 시끄럽다. 신사동 가로수길, 마포구 연남동, 용산구 경리단길과 해방촌 등 ‘핫 플레이스’라 불리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우후죽순 새로 들어서는 건물들로 끊임없이 몸살을 앓고 있는 도시의 생태계. 재생을 넘어 재창조로 이어지는 미래 건축의 패러다임에 오래전부터 주목해온 건축가가 있다. 2012년, 철거 지역의 버려진 붉은 벽돌과 문짝, 창문 등을 활용해 재개발 지역의 삶과 기억을 재생하고자 한 작업의 일환으로 용산구 한남동의 제일모직 비이커 건물을 새롭게 탄생시킨 건축가. 2016년 <행복>에 오래된 주택을 허무는 대신 재생, 일상 예술, 정원을 키워드로 리모델링한 자신의 집을 소개하기도 한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이다. 그러한 그가 역삼동 빌딩 숲을 떠나 이태원로의 주택으로 사무실을 옮겼다.물탱크를 철거하고 뚫은 둥근 천장이 인상적인 이건축연구소. 내년에는 이곳에서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 예정이다.

“쭉 강남에서 일했어요. 회사는 중심 업무 지구인 역삼동 테헤란로에 있었고요.” 이성란 소장이 작년 겨울, 1989년에 지은 주택을 리모델링해 이사한 이유는 이렇다. 8차선 도로가 아닌 주거와 상권이 공존하는 골목, 빌딩의 전형적 사무 공간이 아닌 오피스 하우스를 원했기 때문. 모과나무, 살구나무, 단감나무, 배롱나무가 있는 정원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이성란 소장이 한창 공사 중일 때 눈여겨봐둔 옆집, 1988년에 지은 주택에 플로리스트이자 알롤로 갤러리를 운영하는 동생 이경아 관장이 이사 왔다. 그리고 자매는 나란히 붙은 주택에 산책이라는 뜻의 ‘프롬나드promenade Ⅰ, Ⅱ’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간 기획자가 된 옻칠 작가

작품은 물론 도구에도 시간의 흐름을 담고자 작업 일자를 기록하는 허명욱 작가의 작업을 엿볼 수 있는 한남작업실.

올해 5월, 두 건물의 다채로운 공간 중 가장 늦게 완성한 카페는 옻칠 작가 허명욱이 기획한 공간이다. “작년 허명욱 작가의 용인 작업실 설계를 의뢰받았어요. 보통 미팅 자리에선 머그에 커피나 티를 내기 마련이잖아요. 한데 허 작가는 본인이 만든 식기에 직접 내린 커피와 소담스럽게 담은 딸기를 내오더라고요.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카페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 우스갯소리를 하다 실제 이성란 소장 본인의 건물 빈 공간에 작업실 겸 미팅 장소 겸 카페를 열어보자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름은 ‘한남작업실’이라 붙였다. 허명욱 작가가 직접 도안을 보고 공간을 기획했다. 허명욱 작가의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도 개방하자는 취지도 더했다. 오래되어 공간의 스토리가 느껴지는 테라코타 바닥을 그대로 살리고,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은 폴딩 도어로 교체해 테라스와 정원으로 공간이 이어지도록 했다. 그리고 아라리오 갤러리와 조은숙 갤러리에서 보던 허명욱 작가의 옻칠컵, 트레이, 접시에 커피와 티, 디저트 등을 담아낸다.

제 작업실을 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이 공간에서 저의 작업과 감성을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한남작업실에서는 허명욱 작가가 만든 식기에 담긴 차와 커피, 케이크, 통영에서 공수하는 꿀빵과 제철 재료로 만든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허명욱 작가의 말대로 이곳에는 작가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과거에 쓰이고 현재에 쓰는 도구가 혼재되어 있다. 시간의 의미를 찾는 허명욱 작가 작업의 연장선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작업의 스펙트럼이 넓은 허명욱 작가의 페인팅, 조각, 공예, 사진 등 다양한 작품과 도구로 매번 다르게 구성할 예정. 특히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수집이 창조가 될 때>전과 현재 구하우스 미술관에서 12월 16일까지 열리는 <허명욱의 옻방>전에서 직접 모은 빈티지 가구만을 소개할 정도로 유명한 빈티지 컬렉터인 허명욱 작가가 수집한 가구, 조명, 소품, 작업 도구 등으로 채워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상생은
또 다른 창조의 원천

둘 다 빨간 벽돌 건물이었어요. 색이 예쁘고 질감이 살아 있는 벽돌 벽은 그대로 살렸지요. 일부 벽돌이 없는 곳은 메웠고요. 외벽에 붙어 건물을 가리던 구조물을 뜯어내고 발코니를 만들었어요. 주거 공간이던 지금의 사무실은 구조변경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없애고, 물탱크가 있던 자리를 비워 동그란 천장을 뚫은 정도의 시공만 했어요. 도로에 면한 지하층, 정원과 테라스가 있는 1층을 분리했고요.

(왼쪽) 역삼동의 사무실 밀집 지구를 떠나 이태원로의 주택을 리모델링하고 오피스 하우스로 꾸민 이건축연구소의 이성란 소장. (오른쪽) 프롬나드Ⅱ2층에 위치한 알롤로 갤러리. 이곳에서는 이경아 관장의 플라워 클래스도 열린다.

이경아 대표의 프롬나드Ⅱ는 한 층에 두 가구가 거주해 좁은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구조였다. 널찍한 갤러리 겸 상업 공간으로 쓸 예정이라 일부 내력벽을 남기고 H빔으로 보강한 다음 나머지 벽은 다 헐었다. 어두운 반지하층에는 도로 쪽에 선큰을 만들고, 창문으로부터 자연광이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두 건물 사이의 담장 또한 허물고 길을 텄다. 어느새 가드너가 된 이성란 소장은 레몬밤, 버베나, 수국, 블루 세이지, 레몬그라스, 설류화, 라일락 등이 있는 작은 정원을 조성해 건물과 건물 사이 눈이 쉬어 가는 공간을 만들었다. 빌딩 숲에서 지내다가 나무가 가득한 이곳으로 출퇴근하고 있어요. 땅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덱의 일부는 철거한 다음 식물을 심었어요. 특히 프롬나드Ⅰ과 프롬나드Ⅱ사이의 덱이 그래요. 직사각형의 미니 정원을 만들었는데, 두 건물 사이에 있어 해가 들기 힘든 음지인 점을 고려해 고사리, 이끼, 눈개승마 등 음지식물을 심었어요.”

(왼쪽) 프롬나드Ⅰ에 입점한 실크 웨어 전문점 부희. (오른쪽) 구사마 야요이, 무라카마 다카시, 로버트 인디애나 등 현대미술 화가의 작품과 포스터를 전시하며 프라이빗 플라워 클래스도 열린다.

역삼동에 비해 절반 정도 좁아진 사무실이지만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다. 창문을 열면 초록 정원이 내다보이고 싱그러운 향이 올라온다. 이성란 소장의 이건축연구소와 이경아 대표의 알롤로 갤러리 외 공간에는 실크 웨어 전문 숍 ‘부희’, 가죽 잡화 브랜드 ‘레이틀리 스튜디오’, 리빙 편집매장 ‘두블르쥬’, 주얼리 숍 ‘젬앤페블스’ 같은 개성 있는 가게들이 입점했다. “역삼동에서는 굳이 이웃과 친하게 지내려 노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곳에선 좁은 골목을 오가며 익히게 된 얼굴과 인사를 나누고 교류하게 돼요.”

두 주택 사이의 담을 허물고 건축, 예술, 카페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상생하는 프롬나드의 일상. 경계를 허물고 새로 생긴 길로 드나드는 건 비단 사람 뿐이 아닐 터.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 간의 수다가 끊이지 않고 크게는 문화, 철학으로 서로 두터워질 프롬나드의 없어진 경계가 기대된다.